1편에서 지금의 개인용 컴퓨터, 소프트웨어, 운영체제, 사무자동화(OA, Office Automation)가 진행된 과정을 간단히 알아봤다. 2편에서는 한국에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 표계산 프로그램, 프레젠테이션용 프로그램이 보급된 시점을 더듬어보고 그로인해 우리의 업무 환경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한국의 사무자동화와 사무실 모습의 변화
1. 한글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 (Word Processor Software)
“워드프로세서 전용기”
워드프로세서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하나의 문서를 만들기 위해서는 손으로 직접 적거나 타자기를 사용해야만 했다. 문서 하나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도 만만치 않았으며 완성된 문서의 오탈자, 내용을 수정하는 것은 불가능했었다.
그렇다면 국내에 한글 워드프로세서가 등장한것은 언제인가?
문서를 찾아보면 1980년 과학기술연구소(KIST)에서 개발한 한글 워드프로세서가 소개되었으며 이를 알리는 기사에서 사무자동화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당시의 기사 전문이다.
과학기술연구소 (KIST)는 주한미 대사관과 공동주최로 사무자동화를 위한 워드프로세싱에 관한 세미나를 25~26일 미국무역관에서 개최키로 했다. 전시와 함께 열리는 이번 세미나에서는 워드프로세싱의 구체적인 응용분야, 한글-한자-영문이 동시에 사용되는 워드프로세싱의 소개등을 하게 된다. 워드프로세싱은 서류의 작성, 교정 및 전송등 다양한 기능을 갖추고 있어 사무자동화등에 크게 활용되고 있는데 KIST는 한글-한자 및 영문이 동시에 사용되는 워드프로세싱 시스템을 개발한 바 있다. – 1980.11.20 매일경제
이 때 만들어진 한글 워드프로세서는의 이름은 ‘워드80’이었다. 하지만 ‘워드80’은 가격이 너무 비쌌고 구성이 복잡하고 어려웠기 때문에 상용화에 실패했다. 이듬해인 1982년에는 이를 개량한 ‘워드 88’이 등장했으며 ‘보급형 워드프로세서’ 개발을 목적으로 이를 한번 더 개량하여 마침내 1983년 ‘명필(名筆)’이라는 국내 최초의 상용화 워드프로세서가 등장하게된다.
(명필은 워드프로세서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가 통합된 형태인 전용기 였으며 권장소비자가격은 300만원이었다. 당시 국내 PC 보급대수는 1천대 정도에 불과했으며 SW의 지적재산권이 없던 시절이니 모두가 복제해서 사용했을 것이다. 명필이 소프트웨어로 판매되지 않은 이유이다.)
이렇게 80년대 초반의 사무자동화는 문서작업 공간을 기존의 수기, 타자기에서 컴퓨터로 옮기는 것만을 의미했다.

▲ 한국 IBM의 사무실 <1983년 1월 11일 동아일보>
IBM은 1982년 한국에 수출구매사무소를 설립했다. 1983년 동아일보에 실린 이 사진은 사무자동화 홍보를 위한 컨셉샷으로 보인다.
“워드프로세서 소프트웨어”
이전까지의 워드프로세서는 소프트웨어의 형식이 아닌 소프트웨어 + 하드웨어 일체형 워드프로세서 전용기기였다. 해외에는 이미 워드프로세서와 비지칼크, 로터스같은 스프레드시트까지 보급되고 있었는데 국내에는 왜 소프트웨어 형태로 판매하지 않았던 것일까?
필자는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추측해보자면 소프트웨어라는 제품을 팔기에는 국내 시장이 너무나도 작았고, 소프트웨어 카피를 보호하기 어려워 전용기가 유행했던 것이 아닐까?
1985년에는 삼보컴퓨터에서 IBM PC를 출시하게 된다. 삼보 컴퓨터는 외국 워드프로세서에 저작권을 주고 한글화 작업을 거쳐 ‘보석글’이라 이름을 붙이게되는데, 보석글은 최초의 대중화된 한글 워드프로세서로 자리매김을 하게된다. 그 밖에 인기를 끌었던 워드프로세서 소프트웨어로는 금성소프트웨어에서 만든 ‘하나 워드’가 있는데 보석글과 마찬가지로 한글화시킨 프로그램이었다.
“한국의 빌 게이츠, 이찬진의 등장”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이찬진은 한글 입출력이 완벽하지 못한 국내 워드프로세서에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같은 학교의 컴퓨터 연구회에서 만난 후배들과 함께 한글 입출력을 완벽하게 지원하는 아래아한글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을 만든다. 이때 함께하게 된 사람이 NC소프트의 김택진, 나모 웹에디터를 만든 김형집, 아이온을 개발한 우원식이다.
그리하여 1989년 아래아한글 1.0이 완성되었고 이찬진은 세운상가의 작은 가게를 통해 47,000원에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결과는? 이 획기적이고 저렴한 한글 워드프로세서는 그야말로 대박이 났으며 이듬해인 1990년에 주식회사 한글과컴퓨터를 설립하게 된다. 그리고 93년 한컴은 매출 100억 원의 회사로 성장한다.

▲ 이찬진, 김형집 <1989년 12월 25일 동아일보>

▲ 한글과 컴퓨터에서 만든 아래아 한글의 1.51 버전과 97 버전의 모습
“마이크로소프트의 등장과 한컴의 위기”
물론 승승장구하던 한글과컴퓨터였지만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윈도운영체제가 등장할 당시 대응이 느려(윈도용 개발에 지체) 많은 경쟁자를 만들어냈으며 특히 90년대 중반 심각한 불법 복제로 수입이 증가하지 않았고 회사의 경영이 순조롭지 못해 자금난을 겪기 시작한다.
결국, 한컴은 1998년 6월 마이크로소프트사에 소스코드를 넘기고 개발을 포기하며 2천만 달러 상당의 투자유치를 받는 협약을 맺는다. 하지만 이는 9시 뉴스에도 보도되며 한글 지키기 운동본부가 생겨나는 등 100억원의 투자유치를 받는 조건으로 마이크로소프트와의 계약을 파기하게 된다. (한컴은 당시 250억 원 정도의 부채가 있었는데 한글 학회, 벤처기업협회 등의 모금과 한글 815 특별판을 1만원에 내놓고 100만 회원 가입운동을 통해 경영 자금을 확보한다.)
“한컴의 재도약”
아래아한글은 국제 문서 표준(어쨌거나 수적으로 MS워드를 사용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인 MS워드, Adobe Acrobat에서 읽어볼 수 없으며, 멀티플랫폼 (리눅스, 맥, 윈도우즈)을 완벽히 지원하지 못한다. 회사 역시 초대 설립자인 이찬진씨가 1998년 사퇴했으며 그 뒤 2003년, 2009년, 2010년 세번이나 매각되며 격동의 10년을 보냈다.
하지만 한 때 정부에서 한글을 공식 문서 포맷으로 지정했었기 때문에 여전히 공공기관을 위주로 한/글이 사용되고 있으며, 고어 표현을 완벽하게 지원하기 때문에 한글 학자들이 선호하는 국산 소프트웨어이다. (물론 대부분의 기업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다.) 또 최근에는 2003년 인수해서 공들여온 클라우드 오피스 씽크프리가 좋은 성적을 거두며 한컴은 다시 오피스 사업에 집중하고 있다.
워드프로세서는 한국 사무자동화, 소프트웨어 30년 史에서 전무후무할 정도로 치열한 경쟁을 보였던 분야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보석글, 하나워드, 명필, 글마당, 훈민정음, 마이워드와 같은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들은 거품처럼 사라져버렸다. 승자는 아래아 한글이다.
“한글 워드프로세서의 계보”[1]
1982년 KIST 국내 최초의 워드프로세서 名筆 개발 (출시가격 300만원)
1982년 고등학생이던 박현철 씨가가 애플II용 한글문자편집기 버전 1.0개발
1983년 정재열 씨가 한글3 발표
1985년 MS-DOS용으로 삼보컴퓨터에서 보석글 발표 / OPC가 아름글 I 발표
1986년 2월 옴니테크에서 옴니워드 I 발표
1987년 현대전자에서 바른글 발표 / 7 월 옴니워드 II 발표
1987년 12월 금성소프트웨어에서 ‘하나’발표
1988년 07월 마이워드 발표
1988년 강태진 ‘한글 2000 워드’발표
1988년 11월 삼성데이타시스템이 OA II글벗 판매 시작
1989년 이찬진 씨가 아래아한글 1.0발표.
1990년 10월 9일 (주) 한글과컴퓨터 설립
1992년 삼성 훈민정음 발표
1997년 9월 한글 97, 한컴홈97, 한컴오피스 97출시.
1998년 6월. 마이크로소프트사와 소스코드 양도 양해각서 체결로 한컴 파동 시작.
1998년 8월 한글 815 특별판 출시
2. 표계산 프로그램 (Spreadsheet Software)
1990년 당시 국내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엑셀과 IBM의 로터스1-2-3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역시나 한글입출력이 잘 안 된다는 고질적인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래서 새로운 한글 프로그램을 개발하거나 기존의 영문프로그램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경쟁이 벌어졌고 금성 소프트웨어에서 출시한 ‘하나스프레드시트’가 점유율을 높여나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1994년 리서치아시아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쿼트로프로가 33%, 로터스1-2-3이 28% 엑셀이 27% 하나스프레드시트는 9%를 차지했다.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은 한글 입출력 보다 계산이 가장 주요한 기능이었고, 무엇보다도 국산 스프레드시트가 외산 스프레드시트의 성능을 따라가지 못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국에서도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 운영체제가 시장을 장악하게 된다. 자연스레 오피스(엑셀, 워드, 파워포인트 통합 패키지) 프로그램의 점유율도 올라가기 시작했고 표계산 프로그램의 대명사는 엑셀이 되어버렸다.
3. 프레젠테이션 프로그램 (파워포인트)
국내에 사무자동화라는 개념이 들어온 것은 1980년대 초반이지만 당시 컴퓨터 한 대의 가격은 아파트 한 채 가격을 호가했으며 컴퓨터 누적 보급 대수는 1,000대도 채 되지 못했던 시절이다. 80년대의 사무자동화 시장은 팩시밀리, 복사기, 워드프로세서기기, 오버헤드영사기 (OHP, Overhead Projector) 정도였던 것이다.
“오버헤드 영사기”
오버헤드영사기는 지금의 파워포인트와도 같은 브리핑 자료 발표용 기기로 1972년부터 일찍이 국내에 시판되기 시작했다.

▲투시투영기 OHP250
필자가 중학교에 다니던 시기에도 OHP(Overhead Projector, 오버헤드 영사기) 기기를 사용하던 기억이 남아있다. 칠판 판서를 많이 하시는 선생님들이 OHP를 선호하셨는데, 수업전에 OHP필름 용지에 미리 판서할 내용을 작성해오셔서 OHP위에 올려놓으면 스크린에 필름 용지에 있는 내용이 그대로 투영되었다.

▲ 교실 수업 동안 작동하는 오버헤드 프로젝터 / 이미지: http://goo.gl/TyRJUr
이 오버헤드 프로젝터는 한때 교실이나 기업 회의실의 필수품이었다. 하지만 컴퓨터의 가격이 점차 낮아지고 MS 파워포인트와 대형 TV, 프로젝터를 이용한 방법이 보편적인 브리핑 형식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당시의 기록을 찾아 보자.
한국원자력연구소는 486PC와 파워포인트라는 소프트웨어를 이용, 온라인으로 각모니터에 연결시켰고 동시에 대형 빔프로젝트를 통해 가로 세로 각 2M의 스크린에도 그래픽한 업무보고내용이 나타나도록 해 눈길. <1994년 10월 12일 경향신문>
교육부는 1997년 4천억원을 투입, 전국 20여만 초중고 교실중 5만6천여개 칠판을 대신할 수 있는 멀티미디어 기기를 보급했다 <1998년 6월 30일 경향신문>
1994년도가 되어서야 국가 연구소에서 파워포인트를 이용한 프레젠테이션이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필자가 파워포인트를 프레젠테이션을 처음 접한 것은 2001년경이다. 당시 파워포인트에 심취해있던 국사 선생님이 정성스레 만든 휘황찬란한 애니메이션, 박수소리가 섞인 (지금 생각하면 정말 촌스러운) 슬라이드가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마이크로소프트가 만든 프레젠테이션 프로그램인 파워포인트는 이제 프레젠테이션의 대명사로 굳어졌다. 주로 워드프로세서에 끼워파는 이 프로그램이 이제는 대학 강의실이나 기업체의 회의실, 세미나룸을 온통 뒤덮고 있다. <1999년 9월 14일 한겨레>
4. 사무실 모습과 업무 환경의 변화
사무자동화가 도입되기 전과 도입된 후의 사무실 모습은 서류를 쌓아놓은 캐비닛이 사라졌고 책상 위에 팩스, 컴퓨터, 프린터가 놓인 것 말고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사무 자동화가 바꿔놓은 것은 무엇인가?
컴퓨터와 소프트웨어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한 사무자동화가 바꿔놓은 것은 문서 작성, 문서 전달, 문서 정리, 취합하는 방식의 변화이다. 그로 인하여 우리의 업무 방식이 개인 중심으로 변화하게 되었고 21세기에 와서는 이 방식이 한계에 다다르게 된다.
다음은 신문 속에 등장했던 사무자동화의 모습이다. 다소 컨셉츄얼한 모습도 있으니 참작해서 보시길 바란다.

▲ OA추진단계, 사무자동화 표준시범사무실의 모습 <1988년 4월 8일 경향신문>

▲ 대학생 과외 허용으로 용돈이 두둑해지고 첨단기기의가격 인하등으로 최근 논문작성, 유인물 작성등에 워드프로세서가 큰 인기를 끌고있다. <1990년 6월 12일 경향신문>

▲ 큐닉스 컴퓨터 사무실, <1993년 1월 25일 경향신문>